묵(墨)의 농담(濃淡)으로 자기성찰(自己省察)을 정진(精進)하다.

寫經(사경)으로 성불의 수행을 실천하는 수행자 묵선자(墨禪子) 박지명(79) 거사


경남 울주군 상동면 보은리(통도사에서 언양방면으로 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묵선자불경전시관’에서 찾아 만나다.


묵선자 거사의 조부는 경남 밀양의 문사로 1892년(고종 29년) 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창번(滄樊) 박해철(朴海徹·1868~1934)이다.

창번은 고종 29년~순종 3년 승정원 기주관, 홍문관 시독, 황실교리등 문관으로 일하다가 

1910년 나라가 일본에 통치권을 빼앗기자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했다.


국권을 잃고 시대의 전환기에 대지주의 권문세가였던 가문은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정신적 고뇌를 온몸으로 겪어 낸다.


일본 유학중이던 남곡(南曲) 박시표 선생은 일제시대 좌익과 우익의 혼돈 속에서 귀국을 해 고향으로 돌아와 지방의 대지주로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역할을 가산을 정리하면서까지 음지에서 도움을 전했던 부친의 일화를 담담히 전한다.

<창번 박해철의 그림>


서울에서 30대와 40대 초반을 10여년을 사업을 하다 부산으로 내려와 쉬고 있을 무렵 

역대 대통령의 서예 스승으로 권유를 받기도 했지만 고사(固辭) 했다고 한다.


소년등과(少年登科)라고 

차도 넘치지 않고, 높아도 위태롭지 않으려면 자신을 낮추고 숙이는 것이 필요하다. 라는 묵선자 거사의 예인(藝人)으로서 자세를 엿 볼 수 있는 일화이다.


“사경은 제 삶의 전부입니다. 그 길도 역시 성불할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는 도를 끼치는 수행방법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이를테면 참선, 명상, 염창, 염불, 사경 등 자신만의 방법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되는 것이다. 

묵선자(墨禪子) 박지명 거사는 이 가운데 사경으로 성불하는 수행자다. 

30여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사경과 함께 살아온 그는 궁극적으로 사경을 통해 깨우침을 이루려고 한다.


지난 시간 중에서 묵선자 거사는 경남 울주군 상동면 보은리(통도사에서 언양방면으로 6km 지점)에 위치한 

‘묵선자불경전시관’에서 하루 3천자씩 10시간이 넘는 14개월의 걸쳐 길이 16km, 너비 90cm의 칡으로 만든 비단 위에 

무려 90만자에 달하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완성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 대역사는 ‘불교사경 역사상 초유의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묵선자 거사는 1991년 전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이었던 월하스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사경의 구도에 들어갔다.


수행승 없이 혼자서 바랑 하나 메고 가끔 들려 차를 한잔씩 나누고 가던 스님이 첫 만남 이후 3년째 되던 해에 저에게 

“진정한 사경은 수행의 밑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통도사로 거처를 옮겨 더욱 깊은 내면의 도를 쌓을 것” 

성불을 위한 수행자 길을 걷는 것이 바른 방법이지 않겠냐고 권하던 월하 큰스님.’


큰스님의 상좌(上座)가 되기를 기대하는 수많은 스님들이 차제하고라도 속가에서 붓을 잡고 법문을 적고 있을 뿐이던 필부(匹夫)에게 

출가를 권하던 월하종정 큰스님에게 “이승에서는 출가 보다는 제가 선택한 길을 통해 정진하겠습니다. 

내세에 다시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에 큰스님을 찾겠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부처님이 심(心)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팔만사천법문을 설파한 만큼 반드시 한 가지 방법만을 모든 사람에게 옳다고 강요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은 사경이라는 수행방법을 통해 열심히 살다가겠다고 양해의 말씀드렸지요. 

그때 큰스님의 출가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많은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일찍이 신라의 원효대사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이야기하며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려도 볼 생각을 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져도 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설파한 바 있는데, 

이 가르침을 실천이라도 하듯 우유 한 병으로 사나흘을 연명하며 하루에 적게는 2천자에서 많게는 7천자씩 사경삼매에 젖어들었다고 한다.


묵선자 거사는 서옹, 월하, 월산, 지종, 성수, 정관, 성오스님 등 근•현대 불교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큰스님들과 붓을 통한 인연을 맺었다.


전 조계종 종정 서옹 큰스님은 “글씨에 한 점의 때가 묻지 않고 참으로 곱고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고 칭찬했고, 

월하 큰스님은 “현존하는 우리 서예계와 불교계를 통틀어 박거사의 사경이 최고”라며

“박거사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무량한 사경의 공덕과 사경보시의 공덕으로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했다”고 극찬한 바 있다.


묵선자 거사는 지금까지 경서만을 고집해 30여년 필력을 오로지 부처의 금구명언과 법화경을 비롯한 

금강경 750여벌, 반야심경 5000여벌 등의 사경에만 정진해왔다.


특히, 여러 서체에 두루 능하지만 행서와 초서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창작기법으로 우아하고 율동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서체를 구축해 

서옹큰스님에 의해 “행초서에 있어서는 서예의 재능이 선필(禪筆)의 경지에 이르니 현대의 추사요, 한석봉의 예지에 가깝다”는 극찬을 듣기도 했다.


더욱이 그의 손을 빌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금강경과 반야심경 및 사찰현판과 주련(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또는 경권(經卷)들이 

국내 유수의 사찰들에 남아 있다. 

지난 2006년 10월에는 남과 북이 3년6개월의 복원사업 끝에 복구된 금강산 4대사찰 가운데 하나인 신계사의 현판과 주련에 쓰여진 글이 

묵선자 박지명 거사의 손으로 제작되어 그의 진면목과 위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글씨에 위신력(치유력)이 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부산 성재문화원 이강원 원장은 “묵선자 선생이 글씨에 임하는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인되지 않는 지고한 정(精)과 성(誠)의 마음을 모아 정진하는 도(道)그 자체”라며

“그래서인지 박거사의 글씨에서는 수맥파와 전자파가 차단되기도 하고 경사리(經舍利)에 준하는 이적현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전했다.

“30여년이 넘는 세월을 산중에서 사경에 빠져보았지만 깨달음은 저 멀리 허공에 떠 있을 뿐 쉬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30여년의 풍상을 겪었음에도 득도하지 못했다는 그의 겸손한 표현이 왠지 모를 경외감으로 다가왔다. 

고급스런 금분으로 시원하게 써내려간 금강경 병풍이 둘러쳐진 그의 방 한 켠에는 선친인 남곡 박시표 선생님의 작품이 걸려있다.


묵선자 거사는 궁궐에서 왕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는 조부와 선친을 이어 3대째 글씨를 쓰는 그야말로 ‘서예명가’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어깨 너머로 글씨를 보고 배웠다고 하니 일생을 서예와 함께 해온 그이지만, 본격적으로 붓을 잡은 것은 30여 년 전의 일이다.


“어려서부터 불가의 연이 강했던 가문 탓에 어느 날 부처님의 경을 쓰고 싶어 사경을 시작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바다의 한 컵 물밖에 되지 않는 아쉬움’을 느꼈고, 그 순간부터 사경을 이번 생의 천직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팔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어 보이는 묵선자 거사는 요즘도 하루에 5Km이상을 걷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한국의 옛 맨손 무예인 ‘당수도’를 수련을 해 학창시절 학교를 다니면서 도장을 운영을 했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성철큰스님도 2시간여의 법문이 끝나면 항상 자신의 말은 인간의 말이요 거짓말이며 부처님의 말씀만 믿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새벽 두 시간 정도의 참선을 가진 뒤 하루 10시간씩 계속되는 사경수행은 어지간한 큰스님들의 수행과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묵선자 거사는 ‘반 출가인’이다.


전시관 별실에는 천에 쓰인 그의 사경작품들이 두루마리처럼 둥글게 말려 그득하게 쌓여있는 걸 볼 수 있다. 

사실, 칡으로 만든 거친 천위에 글씨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종이보다 먹과의 마찰력이 심하기 때문에 일필휘지의 힘찬 붓놀림이 없으면 번짐이 생기기 마련.


지금까지 묵선자 거사가 쓴 사경의 글자 수는 공식적으로 약 1500만자에 이른다.

 하루만에 7000자까지 써내는 묵선자 거사를 본 스님들과 재가자들이 그를 ‘사경보살’이라 부를 정도다.


예인(藝人)이란 

사회적인 잣대로 예술적인 감각을 익혀 배워서 다른 이들이 인정하는 단계를 거쳐 00초대작가,

작가라는 명칭을 얻고 난 후 부터가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라고 묵선자 거사는 말한다.


작가는 사상, 철학, 영혼을 작품 속에서 표현하는 사람

즉,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든지 뗏목을 이용해서 건너지만 건너고 나서는 자신의 발로 그 다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예술의 시작은 유법(遺法)입니다. 

남을 흉내 내어 그 법칙을 따르는 것, 하지만 기본을 익히고 나면 무법(無法)입니다. 

기초 이외에는 다 버려야 합니다. 비워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보다 기력은 떨어졌지만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100세까지 붓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제가 붓을 드는 것 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다면 더 어렸을 때 시도 했을 겁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물질이나 명예가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곘습니까? 

타인이 아닌 제 자신에게 만족할 만한 글을 써 보는 것,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몇 개월 남지 않은 팔순을 바라보며 기자와의 약속으로 자신과의 약속인 사경 천자를 미리 썼다는 묵선자 거사.


“남이 못하는 것을 하면 대단한 것이지만 남이 안하는 것을 하는 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이냐?”라고 오히려 되묻는 성품이, 

동양 절제미의 예술세계를 표현하는 소재인 묵(墨)의 농담(濃淡)과 많이 닮았다.


추구하는 어떠한 방향성이든 자기성찰이 동반되지 않으면 정진은 따라 오지 않음을 낮고 잔잔한 소리로 전한다.


순간순간 찰나의 떨림 그로인한 감동, 그것을 위해 오늘도 붓을 든다는 묵선자(墨禪子) 박지명 거사(居士)


대가(大家)의 예(藝)......


현천호 기자

[저작권자ⓒ뉴스아이앤지 무단복제 및 전재, 재배포금지] [뉴스아이앤지 E-mail: news-ing@naver.com Tel: 055-351-3211]
2 0

  최근기사

  카메라고발

  지역뉴스

회사소개 | 윤리강령 | 광고안내 | 책임의한계와법적고지

회사소개 | 윤리강령 | 광고안내 | 책임의한계와법적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