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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N번방에 분노한 밀양 여자들 (권해주)

현천호
2020-04-27

1:29:300 법칙. 일명 하인리히의 법칙.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법칙이다. 

1997년 ‘빨간 마후라’ 사건. 

남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촬영하고 여학생의 동의 없이 유포했으나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는 보호받지 못했고 불법촬영물은 ‘빨간 마후라’라는 이름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상을 소비한 남성들은 아무도 가해자로 처벌받지 않았다. 

불법촬영물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여 온 관용의 역사의 출발점이다. 20여 년 동안 쌓여온 수많은 관용과 솜방망이 처벌이 오늘날 N번방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텔레그램 성 착취, 일명 ‘N번방’ 사건은 공개될수록 충격의 연속이었다. 

N개의 방에서 일어난 N개의 성 착취. 미성년자가 포함된 피해자. 언론을 통해 연일 쏟아지는 잔혹한 범죄수법.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가해자들에게는 필요 없었다. 

그들에게 피해자들은 이미 인간이 아닌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었고 성 착취는 돈을 버는 ‘아이템’일 뿐이었다. 

박사방에 입장한 26만 명의 회원 수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실 N번방의 등장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1997년 ‘빨간 마후라’ 사건에서부터 2000년대 ‘x양 비디오’, 2000년대 중반부터 불법촬영물을 대규모 업로드 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다  2016년 폐지된 ‘소라넷’ 등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관계 영상을 촬영하고 유포하는 범죄는 이미 온라인상에 만연해있었다. 

명백한 범죄행위였으나 남성들은 이를 ‘국산야동’이라는 이름으로 소비해왔다. 

그리고 2018년 하반기, N번방이 등장했다.

만들어진 포르노를 소비하는 것에서 제작하는 것으로, 성인 여성 대상에서 아동 대상으로, 특정 행위를 검색하는 것에서 직접 주문하는 것으로. 

갈수록 자극성과 가학성을 더하며 진화해온 포르노 문화와 성매매 문화는 마침내 N번방이라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된 범죄와 다름없었다.


그들이 자행한 범죄수법의 잔혹함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은 N번방의 불법촬영물을 소비한 회원 수가 수십만 명이라는 사실이다. 

보안 유지를 위해 만들어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한 수많은 유사 N번방의 회원 수를 포함하면 그 수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미성년자와 아동이 포함된 불법촬영물을 보기 위해 복잡한 인증단계를 거쳐 N번방에 입장한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남성들이었다. 내 직장동료, 애인, 친구, 심지어 가족일 지도 모른다. 

누가 가해자인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공포는 실로 엄청난 두려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고 청와대와 국회에는 관련 청원이 쇄도했다. 

3월 1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게시된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는 27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역대 청와대 국민청원 중 가장 많은 인원의 동의를 받았다. 

SNS상에서의 해시태그 운동도 활발히 일어났다. 

사람들은 들끓는 분노를 온라인 공간에 쏟아냈지만 상대적으로 오프라인 공간은 조용했다. 

내 주변에도 N번방 피해자나 가해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오히려 분노를 드러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모두가 공감하는 듯 보였으나 막상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그들을 만나야 했다.


‘N번방에 분노한 밀양여자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했다.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 나와 연대하는 이들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고 안도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것. 

그동안 개인 SNS에서 N번방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온 4명의 여자들이 첫 만남을 가졌다. 

N번방 사건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렇게 우리의 분노를 마구잡이로 쏟아낼 수 있는 모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모임 이름을 ‘N번방에 분노한 밀양여자들’로 정하고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전개할 것인가 고민했다. 

더 많은 사람들의 동참과 연대가 필요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한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라 집회나 시위 형태의 행동은 어려웠기에 서로 대면하지 않되 우리의 관심과 분노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현수막을 게시하기로 결정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짧은 모금 기간 동안 138명이 참여하여 2,560,000원이 모금되었고 총 64개의 현수막이 4월 21일부터 밀양 시내 곳곳의 지정게시대에 게시되었다.

현수막 게시와 동시에 영남루 근처에 작은 공간을 마련하여 ‘우리의 분노를 기록하다’라는 이름의 전시를 시작했다. 

현수막이 우리의 분노를 드러내고 시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전시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확인하고 연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성들이 저마다 한번쯤은 겪어온 차별과 혐오의 기억을 털어놓을 수 있기를 바랐고, 혹시나 전시장을 방문할지도 모를 피해자가 위로받고 치유받기를 바랐다. 

이 문제가 단순히 ‘N번방’ 하나의 문제가 아님을, 오랜 세월 지속된 여성 혐오와 차별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임을 전시장을 방문하는 시민들이 공감하길 바랐다. 

따라서 전시의 가장 핵심을, 공간을 방문한 시민들이 직접 포스트잇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 공유하는 것에 두고 적극적으로 참여를 유도했다. 

개인 4명이 모인, 대표도, 직책도 없는 수평적인 모임이기에 모든 활동은 각자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홍보물 디자인, SNS 계정 관리, 글쓰기, 공간 지킴이 등 저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일하고 있다.

‘N번방에 분노한 밀양여자들’의 후속 활동은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 

현재까지 합의된 것은 오프라인 모임을 원칙으로 하여 지치지 않고 꾸준히 모임을 이어가는 것이다.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을 비롯한 N번방 운영자들이 검거되고, 영상을 소비한 회원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불법촬영물은 그 와중에도 트위터, 디스코드, 다크웹 등 플랫폼을 옮겨가며 여전히 공유되고 있다. N번방 사건에 대한 관심이 식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모든 가해자가 구속되고 처벌받을 때까지, 디지털 성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꾸준히 모임을 이어가며 수사 과정을 지켜볼 계획이다.


전시를 시작한 후, 적지만 꾸준히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밀양에서 이런 활동을 진행한다는 것에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에서, 큰 단체가 아닌 개인들이 모여 진행하기에 다소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제대로 뿌리 뽑지 못한 과거는 언제든 곪아터진다. 

해결방안은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때, 제대로 도려내는 것뿐이다. 

하인리히 법칙을 기억하자. 1997년 빨간 마후라 사건을 방치한 결과가 2020년 N번방 성 착취 사건으로 돌아왔다. 

지금 뿌리 뽑지 못하면 N번방은 반드시 더 큰 범죄로 되돌아올 것이다. 

바로 지금,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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